36세에 요절한, 시대를 잘못 타고난 천재 화가 “모딜리아니” 러브스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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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탈리아 리보르노 태생의 예술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의 삶과 그의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탈리아 태생의 유대인 모딜리아니는 유독 짧고도 불행한 생을 마친 천재화가였습니다. 그는 1884년 이탈리아 피렌체 인근의 조그만 항구도시 리보르노에서 지중해계 세파라디 유대인으로 태어났는데, 그는 자신이 유대인인 데 대해 나름대로 긍지를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지만 열 살이 되면서 병치레를 시작했고, 이는 늑막염·폐결핵·폐렴 등으로 이어지면서 결국 지병으로 인해 14세 때 다니던 중학교를 자퇴한 뒤 그림 개인교습을 받아야만했습니다. 그 후 17세에 폐결핵이 다시 도져 요양차 이탈리아 여러 도시를 돌며 중세 르네상스예술에 심취했습니다. 모딜리아니는 22세 되던 해(1906년) 세계 미술의 중심지인 파리로 가서 몽마르트르 언덕 부근의 허름한 숙소에서 조각과 회화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루마니아 현대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의 권유로 한때 조각에 매달렸으나 석재에서 나오는 먼지로 폐가 손상되자 그 후로는 그림에만 전념했습니다. 22세가 되던 해에 이주했던 파리에서 그는 마지막 14년을 살았습니다. 예술가로서 그는 자신만의 예술 작품을 만들기 위해많은 모델들을 고용했는데, 그 시대의 많은 예술가들이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도 자신이 기용한 모델들과작업 파트너 이상의 관계를 맺곤 했습니다. 당시에는 그림 모델이라는 직업이 오늘날과는 사뭇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데, 실제로 어떤 화가가 모델을 직접 선택하면 후에 발탁된 모델은 그의 애인이 되는 것이 당연시 되었고, 이것은 모델에게도 자신의 경력을 한 걸음 더 높일 수 있는 기회로 간주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과정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화가에게 몸을 팔아 성매매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난도 있었기 때문에, 장래의 꿈이 그림 모델인 자녀를 둔 부모님들은 아무래도 걱정이 앞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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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모딜리아니도 여성의 누드 그림을 그리는 경우,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여성 모델을 기용했는데, 그렇게같이 그림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연인관계가 되었고, 더 위대하고 훌륭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그는 자신이 선택한 모델들과 매우 가깝고 친밀한 관계를 가지곤 했습니다. 매우 잘생기고 매력있는 화가라는 평을 받았던 모딜리아니의 주변에는 자연스레 여자들이 몰려들었고수많은 여성들 가운데, 그와 진지한 관계를 맺었던여성은 대략 세 명 정도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부터 모딜리아니의 예술 작품들에 등장했던여성들과 그와 깊은 사랑을 나누었던 여인들과의러브 스토리를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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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파리에 머물며 그림 작업을 하던 모딜리아니는 “안나 아크마흐토바”라는 여성을 만나게 됩니다. 그보다 5살 연하인 안나는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해 왔고, 어릴 때부터 시에 많은관심을 가지며 매료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님은 딸의 시 사랑이 너무나 제멋대로라고 생각했고, 이것이 딸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기 때문에 극구반대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부모의 반대에도 11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고, 17살 무렵에는 직접 쓴 시들을 모아첫 작품을 출판했는데, 나중에 그녀는 러시아에서 가장 위대한 20세기 시인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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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안나에게 끊임없이 시를 쓰라고 권했던 한 사람이있었는데, 그는 바로 러시아의 젊은 시인 “니콜라이 구밀레프”였습니다. 그 무렵 안나는 여전히 자신의 시 창작활동을 반대하는그녀의 부모님을 달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글들을 외할머니의 성 “Akhmatova” 라는 가명을 사용해 출판해야만 했습니다. 불안해하는 안나의 곁을 지키며 그녀에게 많은 힘이되어 주었던 니콜라이는 점점 안나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고 마침내 그녀에게 프로포즈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안나는 자신의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서 어떻게하면 자신이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는지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습니다. 안나는 미래의 남편이 될 수도 있는 니콜라이에 대한 자신의 감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습니다.
안나의 친구는 그 편지에 대해 “너의 마음의 소리가이끄는대로 따라가면 되지 않을까? 어떤 결정을 하든널 지지해.” 라는 답장을 보내게 되고, 마침내 안나와니콜라이는 1910년 4월에 키예프에서 결혼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가족은 이 결혼에 매우 반대했고 그들의결혼식에 참석하기를 거부했습니다. 두 사람은 러시아를 떠나 파리로 짧은 신혼여행을 떠났고, 그 곳에서 안나는 우연히 모딜리아니를 만나게됩니다. 대화를 주고 받던 두 사람은 서로 이야기가 매우 잘통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모딜리아니는 그녀의 시뿐만 아니라 안나의 아름다움에 순식간에 이끌렸습니다. 실제로 안나는 매우 우아하고 고상한 분위기를 가진여성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가는 곳마다 지나가던남자들이 뒤돌아보며 감탄할 정도로 미모와 매력이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 니콜라이는 이러한 남자들의 관심에 석연치 않아 했고, 특히 모딜리아니가 자신의아내와 친하게 지내며 끊임없는 관심을 보내는 것에매우 큰 불쾌감을 느꼈습니다. 짧은 신혼여행이 끝나고 안나는 그녀의 남편과 함께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지만, 안나는 파리에서 만난모딜리아니와 계속 연락을 했고, 그들의 관계는 그 후로도 12개월 동안이나 지속됐습니다. 안나에게 첫 눈에 반한 모딜리아니는 시간이 흐를수록그녀에게 집착하기 시작했고, 안나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도 더욱 격렬하고 열정적인 내용으로 가득차게되었습니다. 1911년, 결국 그녀는 홀로 파리로 돌아와 모딜리아니를 만났고 이것을 계기로 두 사람의 짧지만 열정적인 연애가 시작되었습니다. 안나는 이미 결혼을 했기에 두 사람의 불륜은 비밀로 남겨져야만 했습니다. 러시아에 있는 남편 니콜라이에게 이 소식이 전해지면큰 일이기에, 당연히 그녀는 모딜리아니와 함께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의 비밀스런 연애는 두 달 동안 지속되었지만, 안나가 남편이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간 후부터모딜리아니는 그녀를 두 번 다시 보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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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딜리아니가 그 다음으로 연애를 한 상대는 “베아트리체 헤이스팅스” 라는 여성으로, 베아트리체는 모딜리아니보다 다섯 살 연상이었습니다. 그녀는 작가이자 시인, 문학 비평가였으며, 영국의 주간 정치 및 문학 잡지 뉴에이지에 광범위하게 글을 쓰는 일을 했습니다. 일생 동안 그녀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많은 연인을 사귈 정도로 자유분방한 성격을 지녔는데, 자기 의지가 매우 강했기 때문에, 젊었을 때는 부모님을 비롯한주변 사람들과 무수한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인 1914년 4월 뉴에이지 저널의 특파원으로 파리로 이동했고, 그 곳에서 1916년까지 정기적으로 칼럼을 기고하는 일을했습니다. 그녀의 칼럼은 주로 파리 문인들의 보헤미안 라이프스타일과 몽마르뜨 예술가들의 보헤미안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것이었고, 그녀는 이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즐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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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아트리체는 1914년 7월, 파리의 한 카페에서 모딜리아니를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데 후에 그녀는 파리의 몽파르나스 쿼터에 위치한 “라 로튼데” 카페에서 조각가로 활동 중인 “오십 자드킨” 라는 한 친구로부터 그를 정식으로 소개받게 되었습니다. 이 곳은 1911년 빅터 리비온이라는 사람이 개업한 유명한 카페였고, 피카소나 디에고 리베라 등 당대 최고의 화가 및 작가 지망생들이 즐겨 찾는 장소였습니다. 베아트릭스는 회고록에서 모딜리아니와의 첫 만남에대해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그녀가 모달리아니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서른 살이었습니다. 자립할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어머니로부터 매달 용돈을 받고 있었고, 그 돈은 주로 술과 마약을 사는 데 쓰여졌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그림도 거의 판매되지 못해서어떤 날은 끼니를 거를 정도로 돈에 찌달리는 생활을해야만 했고, 겨우 팔리는 그림들도 한 작품 당 고작 몇 프랑에 팔렸습니다. 이전에 모딜리아니를 적극 후원하며 그의 작품을 열렬히 구매했던 친구 “폴 알렉산드르”도 전쟁에 나가싸워야만 했고, 그 때부터 그의 작품을 홍보하거나 구매해 주는 사람도 거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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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아트리체와 모딜리아니는 1916년까지 불같은 연애를 했습니다. 모딜리아니는 그녀와 동거하기 위해 1915년 Butte Montmartre에 있는 베아트리체의 아파트로 거처를옮긴 후, 약 2년 동안 같이 살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베아트리체를 모델 삼아 수많은 작품을 만들었는데, 이 무렵 그렸던 그의 그림들은 그녀를 불멸의 존재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화가로서의그의 명성을 올려준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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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딜리아니의 마지막 연인은 “쟌느 에뷔테른”(Jeanne Hébuterne) 라는 여성이었습니다. 가톨릭 산자이자 부르주아적 가정환경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릴 때부터 주위의 시선을 끌만큼 아름다운 외모에 지녔습니다. 쟌느는 15살에 미술학교에 진학하여 화가의 꿈을 키웠고, 이미 옷이나 장신구를 디자인할 만큼 재능이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쟌느가 하얀 피부에 밤색머리를 땋아 둥글게 올리고 다니곤 했기 때문에 그녀를 “느와 드 코코”(야자열매)라고 불렀습니다. 그녀의 오빠 안드레는 예술가 지망생이었고, 그는 여동생 쟌느를 몽파르나스 주변에 사는 많은 예술가들에게 소개시켜주었는데 그들 중 일부는 그녀를 그림 모델로 삼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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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1917년 아카데미 콜로시 미술관에 등록하여본격적으로 미술 공부를 시작하게 되는데, 이 학회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녀는 모딜리아니를 알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모딜리아니는 자신이 마주친 그 어떤 여성이라도 단번에 매료시킬만큼 엄청난 매력과 카리스마를 소유한 남자였습니다.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쟌느는 19살, 모딜리아니는 33살이었는데, 아름다운 눈과 흰 피부에 긴 연갈색의 땋은 머리를 하고 있었던 쟌느를 처음 본 모딜리아니는 그녀에게 마법 같이 빠져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둘은 연인이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매우 사랑했고 같이 살기 위해 잔은Rue de la Grande Chaumiere에 있는 그의 아파트로 이사했습니다. 하지만 성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녀의 부모는 딸이 무일푼의 예술가와 함께 동거를 한다는 것, 그리고그가 유대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들의 연애를 적극 반대했습니다. 1917년 6월부터 동거생활을 시작한 후 모딜리아니는 한동안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작품 활동에 전념하였습니다. 이는 분명 화가의 아내로서, 모델로서 헌신적인 노력을 한 쟌느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해 12월에는 첫 개인전을 열었으나 그중 5점의 누드화는 퇴폐적인 누드화라는 철거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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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은 모딜리아니가 꿈에 그리던 완벽한 여성 그 자체였습니다. 그를 한 눈에 사로잡았던 그녀의 아름다움 이외에도, 그에게 있어 쟌느는 그의 운명이자 영혼의 짝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는 그녀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베풀었고, 그녀 역시그를 존중하며 열정적인 사랑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러던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잦은공포와 불안감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쟁의 참상과 임신으로 인한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던그녀에게 또 하나의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는데, 그 무렵부터 모딜리아니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전쟁의 공포가 그들이 사는 도시를 드리워졌을 때,그들은 그 곳을 떠나 프랑스 남부에 있는 따뜻한 프로방스 지역으로 떠날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29일, 그녀는 니스에 있는 한마을에서 딸 “지오바나”를 낳았습니다. 니스에서 모딜리아니는 거장 르노와르의 초대를 받아 그의 화실을 방문하게 되는데, 그런데 둘의 만남은 그리 편하진 못했습니다. 르노와르 입장에선 그가 애송이 화가처럼 보였을 것이고, 모딜리아니 입장에선 르노와르가 과거 흐름을 대표하는 화가였을 것입니다. 분위기가 냉랭했음에도 불구하고 르노와르는 후에 모딜리아니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기도 했는데, 여기서거장의 또 다른 면모를 볼 수 있기도 합니다.또 모딜리아니는 야수파의 거장 마티스의 초상을 그리고 싶어, 마티스를 만나 데생을 하기도 했는데 모딜리아니의 작업을 보던 마티스가 만족감을 표하고 면담시간을 연장해주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즈음에 그의 화풍은 선명한 색채와 관능적인 형태로 정착되었으며 그의 이름도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모 딜리아니의 생활은 더욱 거칠어져갔습니다. 친구이자 “에콜 드 파리”의 동료이던 피카소는 이미 유명세를 타고 있었으나 모딜리아니의 작품은 그제야조금 알려진 정도였습니다. 특히 딸이 태어나 가정을 책임져야하는 부담감이 더욱 커졌지만 그와는 반대로 그의 경제적 여건은 좀처럼 호전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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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봄, 두 사람은 딸을 데리고 다시 파리로 돌아왔고 그 해 여름에 쟌느는 두번째 임신을 했습니다.같은 해 8월에 모딜리아니는 그의 작품 전시회에 참석하기 위해 런던으로 가야했지만, 그 무렵 그의 건강 상태는 극도로 악화되었고 결국 상태가 너무 심해져서그 어느 곳도 이동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지만, 몸을 가눌 수 조차 없을 정도로 앉아있는 것도 힘들어했고, 그렇게 누워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림을 그리는것이 그에게는 매우 힘겹고 벅찼습니다. 결국 1919년 말부터 그는 거의 하루종일을 침대에 누워 지냈고, 이듬해인 1920년 1월 22일, 그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의식불명 상태로 발견되어 근처에 있는병원으로 급히 이송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이틀 후에 그는 사망 선고를 받았습니다. 당시 의학 보고서에는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기록되어 있었지만, 공식적인 사인은 결핵성 뇌수막염으로 밝혀졌습니다. 자신이 태어난 나라를 너무나도 사랑했던 모딜리아니는 죽기 직전까지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내며그렇게 눈을 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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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임신 8개월이었던 잔은 모딜리아니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자신의 부모님 아파트에 머물고 있었는데, 모딜리아니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다음날 새벽 3시에 그녀는 머물고 있던 5층 아파트 창문 밖으로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두 사람의 장례식은 함께 열리지 못했습니다. 모딜리아니의 장례식은 이탈리아 사회당 의원인 형 에마뉘엘의 후광으로 파리의 유 명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여 성대하게 열려 생전에 그가 받아보지 못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만삭의 몸으로 자살을 한 가톨 릭신자 쟌느는 쓸쓸히 들판에 묻혀야했습니다. 이 둘은 세월이 흐른 후에 모딜리아니 집안의 간청으로 페르 라쉐즈의 묘지에 합장했다고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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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속하게도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일주일 후부터는 그의 작품이 비싼 값으로 팔려나가기 시작했습니다. 2010년 11월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모딜리아니의 1917년 작품인 “소파에 앉은 누드”가 6900만 달러(약 750억원)에 팔렸고, 잔 에뷔테른의 초상화 한 점도 2000만 달러에 낙찰되었습니다. 생존 시에는 작품 한 점에 10달러도 받지 못한 이 불행했던 대가의 명작이 이제는 엄청난 거금에 거래되고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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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에 그린 이 작품은 브란쿠시 원시 조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특히 백작부인이나 귀족 집안의 여성이 아니라 평범한 여인을 그렸다는 점에서 “현대식 누드화의 효시” 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사슴처럼 긴 목, 우수에 찬 길쭉한 얼굴, 긴 코와 꾹 다문 입술, 관람객을 빤히 쳐다보는 눈길..그는 이 그림을 그리면서 자신에게 곧 다가올 불길한 운명을 예감이라도 한 걸까요. 술과 마약에 중독돼 방탕한 삶을 산 그는 이 그림을 그린 지 3년 만에 요절했습니다. 모딜리아니는 생전에 마약 남용과 알콜 중독 등으로고생하며 스스로를 몰락시켰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12년 동안 늑막염과 결핵을 앓았기 때문에 잠시나마 고통을 덜기 위해서 마약과 알코올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게다가 몇몇 사람들은 그의 마약과 알코올 남용이 작품 활동에 몰두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줬다고 주장하면서 모딜리아니는 천부적인 예술적 재능을 지닌 화가였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평생 단 한 번의 전시회를 열었던 모딜리아니는 인물화와 누드화만을 그렸는데, 그림의 모든 초점은 인물 중심의 사랑이었습니다. 생전에 모딜리아니는 돈을 버는 화가로서는 요령을 부리지도 못했습니다. 당시 초상화는 모델과 만나는 횟수라든가 시간에 따라 돈을 주는 것이 관례라 남들은 며칠 몇 번에 걸쳐서 비슷한 작업을 반복했는데 그는 한 번에 그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그린 초상화를 보면 눈이 다른 화가들의 초상화와는 많이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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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딜리아니는 왜 눈동자를 그리지 않았을까요?일화에 의하면 모델이 되어준 쟌느가 왜 눈동자를 그리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당신의 영혼을 알게 되면 당신의 눈동자를 그리게 될 것” 이라고 했다고 합니다.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것처럼 눈은 입보다 먼저 사람의 희로애락을 표현합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눈을 들여다 보는 것은 관심이나 호기심 그리고 애정의 표현일 것입니다.모딜리아니는 상대방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짧은 순간에 초상화를 그리면서 마음의 창인 눈을 다 그려 넣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혹자는 모딜리아니가 상대방의 눈동자를 깊이 들여다 볼 용기가 없는 나약하고 소극적인 성격이었다고도 했습니다. 또 다른 견해는 모딜리아니가 그린 눈은 비록 눈동자가 보이지는 않지만 내면을 바라보는 눈이라는 설명입니다. 우리의 눈은 눈 에 보이는 드러난 것에 집착합니다. 그런데 모딜리아니의 그린 사람들의 눈의 눈동자는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고 있기 때문에 안을 향하고 있으며 우리에게는 흰자위만 보인다는 것입니다.
모딜리아니가 남기고 간 작품들은 조각 25점과 약 30점의 여성 누드화 대작들, 4점의 풍경화를 제외하면 대부분 그의 초상화들입니다. 물론 그 중에서 제일 많은 초상화는 그의 동반자인 “쟌느”로 총 14점이 있습니다. 비대칭 구도와 단순하면서도 대담한 그의 초상화와 누드화는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작품들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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